기록되는/보이지 않는 날

집순이가 왜 집에 있지 못하는가.

벤츄레타 2016. 5. 10. 15:00


01.

 나는 아주 분명한 집순이이다. 이번 긴 휴일은 서울에 사는 친구를 보러 서울에 다녀왔는데, 그 여정을 위해서 정말 오랜 시간 고민했다. 어마어마한 걱정과 스트레스가 몰아쳐서 '나 이대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02.

 하지만 매우 즐거운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친구와 함께 늘 하던 일을 다른 장소에서 하고, 꼭 둘이서 며칠 붙어있으며 지냈던 것이 좋았다.  밤에 키린지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이건 이런 뜻이야, 하고 알려줬다. 스윗 소울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저녁까지 어마어마하게 걸었기에. 그리고 블루 베이비도 듣고. 카드캡터 체리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고 천장이 낮은 복층에서 잠들었다.


 '나 지금 행복해!'라고 많이 말했다. 네가 있어서 그래, 너랑 있는 건 행복이야. 내가 그러면, 그런 말 잘도 한다며 웃는다. 친구는 귀엽고 다정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귀엽고 다정하고 깊은 사람이다. 


 나는 사실 타인의 반복되는 이야기가 싫을 땐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할 땐 왈왈 떠들기도 잘 한다. 그런데 그런게 전혀 필요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손 꼭 잡고 예쁜 것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눈 뜨고 가만히 있다가, 서로에게 아침을 해주고,  무서운 이야기도 했다가, 그게 싫다고 웃긴 이야기도 보고. 비슷한 시간에 눈을 감고 눈을 떴다. 마지막 날에는 서로 편지를 써주고 떠났다. 


03.

상황이 바뀌었다면, 백수에서 어떻게 매일 일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것도 취업하기 싫어서 빈둥 거리다가 어떤 프로젝트 연구원(말이 연구원이지 예산과 정산이라는 어마무시한 것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큰 덩어리 같은 것이다)이 된 것이다. 국가에서 돈 받아 쓰는거라 대단한 깐깐함에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창문을 보며 그냥 박살내고 도망갈까...? 생각한다. 물론 문으로 도망쳐도 되지만 나는 조금 더 극적으로 이 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04.

 별거 아닌 한 달 아르바이트라고 듣고 들어와 앉았는데 어떻게 7월 말까지 프로젝트라서 애매하게 됐다. 돈을 월급으로 받는 게 아니라 나도 정산을 받는 거라서 지금은 꼭 공짜노동 중인 것 같아 기분이 삐리리하다. 하지만 꽤 큰 사업이고, 내가 가려는 쪽과도 연관이 있어서.. 아니 그런데 진짜 이런거 나한테 맡겨도 되는건가 싶다. 여러분 죄송해요. 별거 아니라고 아무나 해도 된다고 했던 교수님을 탓하세요.


05.

 그래서 타고난 집순이가 어째 집에있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 자택근무를 했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에는 내 뇌가 너무 굳었다. 그래, 사실 나는 좀 떠들고 싶었다. 이렇게 내 얘기를 내가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일기가 너무 쓰고 싶었다!! 집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내생각만 할 수 없는 구도가 되어서, 일기 어플을 받아봐도 이런 기분이 안나... 이게 아니야.. 하고 지우기 일수. 이렇게 도화지처럼 밝고 환한 화면! 그 위에 까만 커서가 깜빡거리는 것이 너무 좋다. 돌아 온 기분이다.


06.

 오늘은 농땡이 부리는 중인데 사실 이렇게 농땡이 부리는 것도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놔야한다. 


07.

 꽤 예전부터 블로그나 뭐 그런걸 해왔었다. 그때부터 이렇게 시덥잖은 일기를 쓰고 그랬다. 그때는 그림도 끄적거리고 글도 끄적거리고 했었다. 나는 별 거 아닌 인생 별 거 아니게 산다. 그래서 일기 내용도 늘 별 거 아닌데, 그런 일상들이 좋다. 누군가의 일상이나 취향이나 그런 걸 들여다 보는 것도 즐겁다. 일기 혼자 쓸 수 있지만 이렇게 다 보려면 볼 수 있게 게시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이다. 


 방역차 따라 가다가 내가 모르는 동네의 오손도손 사람들이 모인 작은 골목길을 들여다 보던 날의 기분, 옆옆 동네에서 모르는 아이들을 따라 처음 간 놀이터에서 놀았던 날의 기분, 오래 된 비디오 방에서 누군가 빌려가 거꾸로 꽂힌 비디오를 찾던 어린 날의 기분. 교실 뒤 다른 반 친구들의 정성스러운 가족신문을 보던 날의 기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기분은 꽤나 두근거린다. 일상의 소소한 모습을 올리는 인스타그램도 그래서 좋다. (인스타그램 초반에는 대부분 그랬었다...) 이 사람은 이게 마음에 들었구나, 이런게 좋구나, 이런 하루를 보내는 구나. 하게 되는. 나는 스스로 관조적이고 아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그냥 세보이고 싶어서지, 사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08.

 와 비가 아주 때려 붓는 구만. 집에 가고 싶다. 결재 받으러 가야하는데... 귀찮아...